
유년시절을 지배했던 회색계단
집 마당 한 편에 있던 2층 주인집으로 통하는 시멘트 계단은 그 자체로 독립적일 만큼 유년시절의 기억의 중추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자로 뻗은, 어린 내가 한 발 씩 오르기엔 다소 높은, 반듯한 회색 빛 계단은 빛의 각도에 따라, 계절의 온도에 따라, 공기 중의 습기에 따라 그 색을 달리 했습니다.
계단은 표면적으로 놀이의 대상이었지만 그 시절의 상황이 녹아든 회색계단은 오르고자 하는 욕망과 올라오기를 허락하지 않는 공포의 이중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한 보편적 비율보다 더 크게 그려진 계단들은 곧 어른의 부재와 관심 받지 못했던 소녀의 자괴감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몰래몰래 계단을 하나 씩 오를 때 마다 나의 눈높이는 달라져 있었고 높아진 눈높이는 어른의 눈높이 임을 직감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빨리 어른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나의 눈높이는 어린몸에 갖힌체 높이 올라가지 못했고 올라갈 곳을 빼앗긴 시야는 안으로 안으로 리플레이 되었습니다. 미래가 과거가 되고 과거가 다시 미래가 되는 혼란이 계속되었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래전에 중단한 계단오르기 놀이를 재현해 보기로 합니다.
뒤섞인 페이지들을 정리하여 계단에 순서대로 올려두고 한계단씩 밟고 올라갑니다. 그렇게 혼재되어있던 감정과 이미지들에 시간성을 부여합니다. 계단을 오를수록 페이지들은 발자국으로 더럽혀질 것이고 나는 그렇게 비로소 미래로 나아갑니다.